
별세의 사랑
이중표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교회 북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책 소개
📖 1. 서론 – 사랑은 별세로부터 온다: 아가페의 본질
『별세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가볍게 소모되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랑, 곧 아가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신학적 고백이자 실천적 권면입니다. 저자 이중표 목사는 이 사랑을 “별세의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이 사랑은 인간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는 스웨덴 신학자 안데르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를 인용하면서, 에로스(욕망), 필레오(우정), 스톨게(가족애)와 같은 인간적 사랑과 아가페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합니다. 에로스는 필요와 가치에 반응하지만, 아가페는 사랑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상대의 매력, 유익, 친밀함에 따라 사랑하지만, 아가페는 그 어떤 조건 없이 악인에게도, 원수에게도 흘러넘칩니다.
저자는 이 아가페야말로 그리스도의 ‘별세’를 통해 세상에 부어진 사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별세의 사랑’은 곧 십자가 사랑입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중심적 존재로부터 떠나 하나님 중심의 존재로 옮겨감으로써만 이 사랑은 주어지고, 실현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로 이것이 별세의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살아 있으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삶. 이 삶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신적 본성에 참여한 실존의 방식이 됩니다.
별세의 사랑은 자기 욕망을 죽이고, 타인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오래 참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낭만적 사랑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지점이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가능해지는 은사적 사랑입니다.
『별세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장을 해설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죽는 제자의 자리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의 실체를 마주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첫 장은 선언처럼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사랑을 별세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단지 정의가 아니라, 전 생애를 바쳐 경험하고 살아낸 자의 고백입니다.
📖 2.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의 공허
『별세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서두를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중표 목사는 이 말씀을 “신앙의 겉모습과 능력, 헌신의 외양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無)’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오늘날 교회가 종종 열심과 능력을 사랑으로 오해한다고 지적한다.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고, 지식과 믿음으로 산을 옮길지라도, 그 동기와 중심에 아가페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무관한 외형일 뿐이다. 열정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며, 은사는 성령의 선물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은사는 거룩하지 않고, 사랑 없는 믿음은 위험하며, 사랑 없는 헌신은 위선일 수 있다.
특히 그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는 표현을 깊이 묵상한다. 이는 자기희생의 최고봉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행위조차도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나 신비주의적 욕망, 자기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이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우리가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행위조차, 그 중심에 십자가적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공허한 제사,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별세의 사랑』은 이 지점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행위 이전의 존재의 변화,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죽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인격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도덕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존재로부터 벗어나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비우는 성령의 역사다. 이 사랑은 단지 겸손하거나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죽는 훈련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내적 성결이다.
그는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헌신도, 설교도, 찬양도, 선교도, 순교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 말은 헌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헌신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일 때만이 비로소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동기가 되고, 방향이 되고, 해석이 되며, 평가가 된다. 그러므로 별세의 사랑이란,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신자의 가장 깊은 양심의 자리다.
이중표 목사는 이 단락에서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사랑이 없이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신앙적 행위들을 다시 바라보라. 사랑이 빠진 설교는 단지 지식의 전달일 뿐이며, 사랑이 빠진 열정은 신앙의 광기일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종교적 억압이고, 사랑이 없는 정열은 자기 우상 숭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 사랑은 반드시 별세를 통과해야만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다.” 별세 없는 사랑은 결코 아가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자기를 죽여야 한다. 그 십자가 위에서만 참된 사랑은 탄생한다.
📖 3. 오래 참는 사랑, 성령의 인격이 되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별세의 사랑』에서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단순히 “사랑의 정의”로 읽지 않는다. 그는 이 속성들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인격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십자가의 성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나 감정적 수련으로 이룰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별세의 길 위에서만 열리는 인격의 열매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표현은 헬라어 ‘마크로쥐미아’(μακροθυμία), 곧 분노를 더디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사랑은 참고 견디되, 단순히 침묵하거나 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대를 여전히 긍휼히 여기고 품는 품격이다. 이중표 목사는 이 속성에서 십자가 위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 조롱과 채찍, 침뱉음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시고, 끝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 기도하신 그 사랑. 인간은 오래 참지 못한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만, 이 성령의 사랑이 그의 인격이 된다.
“사랑은 온유하며…” 온유는 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힘을 가졌지만 다루는 방법을 아는 절제된 사랑이다. 온유는 진리를 왜곡하지 않으며, 정의를 포기하지 않지만, 그 방식에 있어 상대를 부드럽게 감싸고 높여준다. 온유는 상대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정죄보다 회복을 택하며, 자신의 의보다 상대의 유익을 앞세운다. 이 사랑은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 심지어 배신자 유다를 대하실 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격이신 성자 예수의 마음이다.
『별세의 사랑』은 이어서 사랑의 ‘하지 않는’ 속성들에 주목한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이중표 목사는 이들을 ‘십자가 아래에서만 가능해지는 부정의 덕’이라 부른다. 인간은 시기하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내세울 수 없으며, 자기 자랑의 여지를 스스로 포기한 존재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쉽게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인간적 본성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성품이다. 별세한 인격에게만 허락된 성령의 결실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중표 목사는 이 대목에서 사랑이 단지 관계 윤리나 감정적 조화가 아니라, 진리의 기준 위에 선 실천적 정의임을 강조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이 사랑은 비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섬긴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진리 안의 사랑’이다.
결국 바울은 선언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중표 목사는 이 문장을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허락된 최대치의 은혜로 살아낸 삶의 서술이라 말한다. 모든 것을 참는 사랑,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 중에 맺는 열매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다. 사랑은 성령의 인격이며, 그 인격은 자기를 부인한 자 안에서만 거한다.
『별세의 사랑』은 이 사랑이 곧 성령이 머무시는 자리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존재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독자의 가슴을 찌른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사랑은 나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 맺어진 성령의 열매인가?” 이 질문 앞에 선 자만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출처를 되묻게 되고, 십자가를 다시 붙들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단 한 번도 인간의 본성에서 솟아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추천의 글 – 사랑은 최고의 은사이자 별세의 완성이다
『별세의 사랑』의 마지막 장은 바울의 고백,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단지 감성적인 요약이나 위로의 문장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조차도 종말에 이르면 사라지지만, 끝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실재로서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즉, 사랑은 신자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실제이자, 신자의 존재 방식이며, 별세의 최종 완성이다.
믿음은 장차 볼 것을 아직 보지 못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자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순간, 믿음은 시야로, 소망은 실재로 바뀐다. 그때 남는 것은 단 하나,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영원 속에서 계속될 유일한 실재이며, 지금 우리의 삶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할 하늘의 삶의 방식이다.
이중표 목사는 말한다. “사랑은 은사 중의 은사이며, 열매 중의 열매이다. 성령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유일한 증거다.” 그러므로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사랑은 신자의 존재 자체를 규정짓는 표지이며,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서 머무는 통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 『별세의 사랑』은 끝까지 한 가지를 강조한다. 이 사랑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사랑은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본능, 나를 중심에 두려는 욕망, 조건을 따지는 계산, 쉽게 낙심하는 감정—이 모든 것들은 죽어야 한다. 오직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이 사랑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별세의 사랑은 가장 고결하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꽃피는 은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는 자신을 낮추셨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복종이고, 희생이고, 비움이다. 이 사랑은 말로 증명되지 않으며, 삶으로만 증명된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의 작은 죽음—별세—을 통해 구현된다.
『별세의 사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진정한 사랑은 별세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별세 없는 사랑은 언제나 내 중심의 사랑이고, 내 기분의 사랑이며, 내 유익의 사랑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사랑은 하나님 중심, 상대 중심, 영원 중심의 사랑이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남는 사랑,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도 유효할 사랑이다.”
이 마지막 선언은 독자에게 조용한 감동과 묵직한 결단을 동시에 남긴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이전에, 사랑의 십자가 앞에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를 내려놓고,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려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시작된다. 이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장 위대한 삶이며, 제자의 완성이다. 그것이 바로 별세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