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의 도서관

별세의 여인 표지

별세의 여인

이중표

"룻기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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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1. 서론 – 별세는 떠남이며,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이다

『별세의 여인』은 단지 룻기 강해가 아니다. 이중표 목사는 이 책을 통해 룻이라는 한 여인의 이주와 고백, 만남과 결혼의 전 여정을 ‘별세’라는 영적 원리로 해석한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별세(別世)는 이 세상을 떠나서 다른 세상을 사는 삶”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단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향, 혈통, 가치관, 욕망, 안정된 세계를 떠나는 결단의 여정이다.

룻은 모압의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 이방 여인에게는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잡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한다. 이는 단순한 가족의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삶으로의 신앙적 이주, 곧 별세의 시작이었다.

이중표 목사는 성경 속 인물들—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모두가 이 별세의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계보 속에서 룻 역시 동일한 신앙의 구조를 따른다. “그녀는 죽은 남편을 떠났고, 새로운 신랑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모압을 떠났고, 베들레헴에 들어섰다. 그녀는 과거를 내려놓았고, 은혜의 미래를 붙들었다.” 이 과정이 바로 『별세의 여인』이 말하는 신앙의 길이다.

이 책은 룻기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단지 인생의 고난이나 감동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각 장면마다 신부된 교회로 부름받은 성도의 내적 여정을 추적한다. 룻은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을 주로 삼는다. 그녀의 여정은 고난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의 모형으로 서게 된다.

별세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별세란 믿음으로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 세상의 기쁨을 내려놓고,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별세의 여인』은 룻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 별세의 영성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무엇에서 떠나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별세는 방향 없는 방황이 아니다. 별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 2. 룻의 결단 – 고향과 혈육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 여인

룻기의 초입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는다. 모압 땅은 기근을 피해 이주한 가족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이방 여인 룻에게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으며, 시어머니마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모든 상황은 ‘돌아서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때, 룻은 놀라운 결단을 한다.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는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별세의 여인』에서 이중표 목사는 이 장면을 룻의 신앙이 단지 인간적 충성이나 가족애를 넘어선, 거룩한 별세의 결단이라고 해석한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민족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뿌리를 끊고, 혈연과 민족, 문화와 안정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건이다.

저자는 룻의 이 결단을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나란히 놓는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처럼, 룻도 자신의 본향을 떠난다. 그러나 이방 여인 룻에게는 그러한 명령도, 약속도, 계시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시어머니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신앙적 끌림 안에서 베들레헴을 선택했다. 이중표 목사는 이 장면을 “계시 없는 신앙, 확신 없는 선택, 그러나 진실한 별세”라고 설명한다.

룻의 고백은 단지 감정적인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동반하는 결단이었다. 그녀는 고백한다. “죽는 곳에서 죽고 거기 묻힐 것이라.” 이 말은 단지 시어머니와의 동행을 넘어서, 자신의 미래를, 장례를, 인생의 결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기포기의 선언이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신앙이다. 떠난다는 것은 단지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놓는 것이다.

『별세의 여인』은 이 결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떠나야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고,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새로운 시작이 없다.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에 편입된 최초의 여성 신부가 된다. 그녀는 이방인이었지만,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다.

이중표 목사는 룻의 결단이 단지 여성의 헌신으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룻을 신부된 교회의 모형, 즉 하나님께 부름받은 모든 성도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그녀는 남편을 잃었고, 자기 나라를 떠났고, 자신의 앞날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별세의 끝에서 룻은 새로운 신랑을 만나고, 새로운 백성이 되며, 새로운 구속사의 통로가 된다. 이는 모든 신앙인의 여정이자, 교회가 걷는 순례의 길이다.

『별세의 여인』은 이 고백으로 우리를 도전한다. “너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회심의 질문이 아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야 할 성령의 음성이다. 룻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새로운 생애를 열었지만, 우리 역시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떠나는 훈련 속에서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간다. 이 여정이 곧 별세의 길이다.


📖 3. 「보아스를 만남」 – 신랑 되신 주님과의 은혜로운 연합

『별세의 여인』에서 가장 주목할 장면은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다. 이는 단지 운명적 만남이 아니다. 이중표 목사는 이 만남을 구속사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베들레헴 땅에서 우연히 발을 디딘 밭, 그곳의 주인 보아스는 구속자의 형상이며, 룻은 교회의 예표로 제시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혼인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가 찾아온 시간, 구속의 언약이 시작된 순간이다.

룻은 아무런 소유도 없었다. 그녀는 밭의 귀퉁이에서 이삭을 줍는 자리에 있었다. 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아무 권리도 없던 존재. 그러나 보아스는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다. “내 딸아, 이삭을 줍는 일을 그치지 말라.” 이것은 단지 친절의 말이 아니라, 거절당하지 않는 은혜의 시작, 수치에서 영광으로 이끄는 초대였다. 이중표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불러주시는 은혜의 그림자”라고 표현한다.

보아스는 룻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는 룻의 성실함과 믿음, 시어머니를 향한 헌신, 무엇보다 하나님을 선택한 그 선택 자체를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그가 룻을 보호하고, 양식을 주고, 자리로 초대하는 일련의 행위는 자격 없는 자에게 흘러드는 언약의 흐름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교회를 위해 친히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고 품으시는 복음의 장면이다.

룻이 보아스를 다시 찾아가 이불자락을 펴달라고 할 때, 그 장면은 더욱 극적으로 전개된다. 이는 단순한 청혼이 아니라, 구속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간청하는 믿음의 요청이다. 이불자락은 보호와 소속, 그리고 언약을 상징한다. 룻은 자기의 과거, 신분, 미래 모두를 내려놓고 그 발 아래 엎드린다. 이중표 목사는 이 장면을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은혜에 항복하는 신앙의 자세”**라고 강조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여인의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구원을 구하는 회심자의 모습이다.

보아스는 그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친족 중 더 가까운 구속자가 있음에도 자신이 직접 그 권리를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그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동시에 은혜의 신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드러난다. 그가 룻을 사는 과정은 단지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던 여인을 기업의 반열에 올리는 구속의 사역이다. 『별세의 여인』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를 사시기 위해 십자가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로움을 증언한다.

이 만남은 결국 새로운 언약의 시작,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예수와 연합하는 영적 혼인의 상징이다. 룻은 수치를 벗고, 보호받으며, 회복되고, 상속을 받는다. 그녀는 자기 소망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다윗의 계보를 잇는 구속사의 어머니가 된다. 이방 여인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그 여정 전체를 가능케 한 단 하나의 힘은 은혜였다. 룻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받았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별세다.

『별세의 여인』은 이 만남의 장면에서 독자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발 아래 엎드려 있는가?” 우리의 별세는 단지 무엇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로 가는가, 누구 안에 머무는가로 완성된다. 룻은 보아스를 만남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성도는 예수를 만남으로 존재가 바뀐다. 이 만남은 억지가 아니고 운명이 아니라, 은혜로 초대된 약속의 자리이다. 별세는 결국, 그분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며, 그분의 품에 안기기 위해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길이다.


📖 추천의 말 – 교회를 상징하는 별세의 여인, 복을 전하는 생명의 통로

룻기의 결말은 모든 반전의 끝이다. 룻은 고아와 과부, 이방 여인이라는 세 겹의 약함을 지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함을 능력으로 바꾸시고, 그 무명의 인생을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복된 통로로 삼으신다. 『별세의 여인』은 바로 이 장면에서, 룻이 단지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움직이는 매듭점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강조한다.

룻이 보아스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은 오벳이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다. 이 계보는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어떻게 다윗의 조상이 되는가? 이중표 목사는 대답한다. “룻이 떠났기 때문이다. 룻이 자기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룻이 별세했기 때문이다.” 별세의 신앙은 개인의 복을 넘어,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생명의 통로로 연결된다.

저자는 룻의 삶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교회는 누구인가? 교회는 한 남자를 만나 자기 인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 룻과 같은 존재다. 이방인이었고, 죄인이었고, 멸망받을 수밖에 없던 자들이, 은혜로 택함받아 신랑 되신 주님과 혼인한 신부—이것이 교회다. 교회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교회는 복을 소유하기보다 복이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늘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순종으로 참여하는 존재다.

『별세의 여인』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룻의 여정은 성도의 여정이다. 시작은 절망이었지만, 끝은 구속이었다. 시작은 이방이었지만, 끝은 교회였다. 그리고 그 여정을 가능케 한 것은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었다. 단 하나, 별세였다. 자기를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고, 미래를 주께 맡기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되는 복된 사람이 된다.

룻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룻처럼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모압은 어디인가? 우리가 부인해야 할 자아는 무엇인가? 우리가 엎드려야 할 그분의 발 아래는 어디인가? 별세의 길은 쉽지 않지만, 그 길 끝에는 반드시 보아스 되신 주님이 계시고, 다음 세대를 살릴 생명의 계보가 이어진다. 이 책은 단순히 룻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예언적 선언이다.

그러므로 『별세의 여인』은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이방 여인 룻처럼 살라. 교회는 그녀처럼 자기를 죽이고, 신랑을 만나고, 후대를 살리는 별세의 여인이다.” 이 메시지는 한 여인의 삶을 넘어, 모든 신자의 삶, 모든 공동체의 소명, 모든 교회의 존재 이유를 일깨우는 복음의 요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