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세의 목자
이중표
"시편 23편 강해"
교회 북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책 소개
📖 1. 서론 – 시편 23편을 넘어, 목자 되신 주님 안에 죽어가는 여정
『별세의 목자』는 단순한 시편 묵상집이 아니다. 이 책은 다윗의 시편 23편을 통해, 주님을 나의 목자로 고백하는 자가 걷게 되는 별세의 여정을 따라가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다. 저자 이중표 목사는 이 시편을 단순히 위로의 노래로 읽지 않는다. 그는 이 노래를 죽음의 길을 걷는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신뢰의 시, 곧 목자와 양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말하는 절절한 고백으로 읽는다.
그는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첫 구절을 마주하며, 모든 참된 고백은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주체가 되려는 교만과 자율성을 벗지 못하지만,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나의 길을 스스로 정하지 않는 양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 고백은 겸손한 의식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포기의 선언이다. 목자가 계시기에 나는 따라갈 뿐이며, 목자가 인도하시기에 나는 맡길 뿐이다.
이 책은 시편 23편이 결코 평탄한 길을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지나 생명에 이르는 ‘십자가 순례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당시, 그는 왕좌에 있지 않았고 목숨이 위태로운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한다. 이는 환경의 반전이 아니라 시선의 반전, 곧 신뢰의 전환이다. 『별세의 목자』는 바로 그 반전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자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의 인도하심에 죽어가는 순종의 길이 되는지를 설파한다.
저자는 이 시편이 위로의 시편이기 이전에, 삶 전체를 맡기는 자의 죽음의 시편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만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때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이끄시고, 그 골짜기 한복판에서 자신이 여전히 목자 되심을 증명하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그분이 주신 은혜가 아닌 그분 자신을 사랑하는지 드러나게 된다. 『별세의 목자』는 그런 점에서 시편 23편을 단순히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내고 죽어가는 제자의 신앙 훈련으로 삼는다.
이 책의 독창성은 ‘목자의 인도하심’이라는 개념을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실제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의 길로 풀어낸다는 데 있다. 푸른 초장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골짜기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원수 앞에서 평강을 노래하는 삶. 이 모두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며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만이 걷는 길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그 길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길을 먼저 걸어간 한 양의 간증을 통해 “나도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 2. 「주는 나의 목자시니」 – 인도하심 속에 사는 별세의 삶
『별세의 목자』는 시편 23편의 첫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단순한 믿음의 고백으로 읽지 않는다.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존재의 전환을 선언하는 신앙의 단절로 읽어낸다. '나의 목자'라는 말은 단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내 뜻대로 살지 않겠다는 항복의 선언이며,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목자 되신 주님”이라는 호칭 앞에서 양 된 자의 운명을 분명히 한다. 양은 결코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양은 길을 찾지 못하고, 자기 목숨조차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처절한 인정이자, 하나님의 손에 모든 삶의 방향과 결정권을 온전히 맡기는 별세의 시작이다. 이 고백이야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첫걸음이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구절은 단지 안락함을 뜻하지 않는다. 이중표 목사는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먼저 우리의 속도를 늦추는 인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양은 쉬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멈추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억지로라도 누이신다. “누이신다”는 표현은 주도권의 이전을 뜻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목자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안식하고 멈추는 훈련. 이것이 별세의 첫 단추다.
‘쉴만한 물가’는 평온한 곳이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목자는 때로 높은 절벽을 지나고 거친 바위를 넘어 양들을 인도하신다. 이는 양의 시야에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강조한다. 그 길이 평안한가 아닌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에 목자가 함께 계신가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다. 주님의 인도는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 안의 욕망과 계획을 부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곧 거룩하신 목적을 위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저자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는 결국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과정임을 밝힌다. 우리가 소생하는 것은 내 기분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 의의 길은 화려하거나 곧은 길이 아니다. 오히려 좁고 험하며, 내가 스스로 원한 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나의 욕망이 죽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의로운 별세의 길이다.
이중표 목사는 그 길이 축복의 길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정직하게 말한다. “그 길은 고통의 길이며, 자기를 잃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배우고,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 길은 순종의 길이자, 훈련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길, 나를 깨뜨리시고 회복시키시는 길, 그리고 나를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으시는 길이다.
결국,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은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의 순종과 자기를 꺾는 훈련 속에서, 매일매일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신앙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나의 뜻을 꺾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별세의 고백이다. 그리고 그 고백을 진심으로 드리는 자는, 목자의 인도하심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죽고, 가장 평안하게 다시 살아나게 된다.
📖 3.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죽음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참된 신뢰
『별세의 목자』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시편 23편 4절은, 단순한 위로나 신앙적 수사로 넘길 수 없는 깊은 고백을 담고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다. 고통을 제거하는 신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야말로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사망의 골짜기로부터 건져내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골짜기를 '다니게 하신다'고 하셨다. 다닌다는 것은 단순한 지나침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그 어둠 속에 두신다. 그 어둠이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고, 우리의 신앙이 껍질을 벗고, 참된 신뢰로 단련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은 이 구절을 통해 고통의 신학을 다시 세운다. 죽음의 골짜기는 실패가 아니라, 믿음이 가장 정결해지는 제련의 골짜기라는 것이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 말은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은 있다. 눈물도 있고, 외로움도 있고, 절망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이유는,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중표 목사는 “동행이 가장 위대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목자가 그곳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골짜기의 깊이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면, 골짜기도 성소가 되고, 절망의 자리도 회복의 통로가 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한다. 지팡이는 인도하는 도구이고, 막대기는 보호하는 도구다. 하나님은 단지 방향만을 보여주는 분이 아니라,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시는 전능의 손을 가지신 분이다. 동시에, 그 지팡이와 막대기는 징계의 도구이기도 하다. 길을 벗어날 때 양을 치고, 가지 못할 곳으로 갈 때 막아 세우시는 목자의 엄격한 사랑이 담겨 있다. 이 안위는 포근함이 아니라, 훈련과 절제를 포함한 거룩한 보호다.
이중표 목사는 여기서 ‘동행의 신비’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가장 분명히 경험하는 하나님은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외쳤지만, 사망의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다. 이는 성숙한 신앙의 반영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게 되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별세의 자리이며, 신앙의 깊은 고요다.
『별세의 목자』는 이 장에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강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말한다. “당신의 골짜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저자는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를 고통에서 구해주신 적보다, 고통 가운데 함께해주신 적이 더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배웠다.” 그러므로 사망의 골짜기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장소가 아니라, 믿음을 정금같이 연단하는 하나님의 연단소요, 신뢰를 성숙시키는 제자도의 훈련장이다.
결국, 시편 23편 4절은 별세의 영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럼에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는 오늘도 그 골짜기를 지나갈 수 있다. 이 신뢰가 진짜 믿음이며, 이 신뢰가야말로 별세 신앙의 본질이다.
📖 추천의 글 - 「평생을 따라오는 은혜와 집으로 돌아가는 영원의 목자」
『별세의 목자』는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절정을 맞는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별세의 여정이 단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오히려 그 끝에 풍성한 은혜와 영광의 집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한다.
그는 먼저 주목한다. “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은 원수들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원수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녀를 앉히시고 축복의 상을 베푸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시간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종종 원수의 제거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나의 존재를, 나의 목자 되심을 드러내신다. 별세의 사람은 원수의 제거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정을 더 귀하게 여긴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기름 부음은 왕의 머리에만 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자의 사랑과 선택, 그리고 보호하심을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인장이다. 이 구절은, 고난을 지나온 양이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는 선언이며, 목자께서 자랑스레 기름을 부으시는 장면이다. 『별세의 목자』는 이 장면을, 고난 속에서 목자의 음성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걸어온 이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표창식이라 말한다. 이는 명예가 아니라 은혜다. 내가 견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붙들어 이끌어 오셨다는 회복과 감격의 자리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저자는 이 마지막 구절을 “동행의 회고이자, 영원의 고백”이라고 부른다. 목자가 인도하시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앞서 인도하시던 여정은, 이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이름의 동반자들이 뒤에서 나를 따르며 완성해간다. 과거에는 내가 하나님을 따라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따르며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이 은혜는 멈추지 않고, 실수 속에서도, 넘어짐 속에서도, 불신 속에서도 결코 나를 놓지 않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마지막 선언은 단순히 천국에 간다는 약속이 아니다. 이중표 목사는 이 구절을 모든 별세의 여정을 마친 자에게 주시는 궁극의 안식처, 곧 “집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이 집은 죽음을 지나 만나는 곳이며, 오랜 방황과 수고를 마친 자가 마침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자리다. 하나님이 목자 되시고, 내가 양 되었던 시간들은 때로 외롭고, 무거웠으며, 눈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모든 여정은 이 집을 향한 여정이었다. 이 집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고, 다시 울 수 있고, 다시 감사할 수 있었다.
『별세의 목자』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독자에게 조용한 도전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를 따라 걷고 있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따라 걷는 사람은 결국 영원한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망의 골짜기를 끝없이 방황하게 될 뿐이다.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오직 보여준다. 한 양이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죽음과 생명을 지나, 끝내 영원한 집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 여정은 특별한 사람이 걷는 길이 아니다. 매일의 삶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내 뜻을 꺾고, 말씀에 순종하며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길을 걷는다.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주께서 차려두신 상, 부으시는 기름, 따라오는 선하심, 그리고 준비된 집이 기다리고 있다. 『별세의 목자』는 그 집을 소망하며, 오늘도 고개를 들어 목자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주는 침묵의 확신이며, 순례자의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