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세의 계명
이중표
"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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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1. 서론 – 율법을 넘어서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계명
『별세의 계명』은 율법으로 대표되는 십계명을 단지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교훈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율법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로 풀어낸다. 저자 이중표 목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십계명이 본래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 된 인간이 율법 앞에서 철저히 깨어짐으로써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별세의 자리로 초대받게 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도구였음을 강조한다.
그는 계명의 기원을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단지 금지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신뢰의 표지로 주신 언약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말씀을 어기고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신성한 교제를 상실했고 에덴의 평화를 잃게 되었다. 이로써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별세의 계명』은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십계명은 처음부터 완전히 지켜내기 위해 주어진 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이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고, 그 계명의 석판을 언약궤 속에 넣으라고 명하셨다. 율법은 지킬수록 오히려 죄를 더 깊이 인식하게 만들고, 그 죄를 깨달은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도구였다. 이처럼 계명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며,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내어놓는 별세의 통로로 주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통찰이다.
이중표 목사는 “율법은 우리를 별세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의에 빠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키려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 전자는 율법 아래 죽고, 후자는 복음 안에서 산다. 십계명은 결국 이 둘 사이에서 우리를 복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신비로운 별세의 장치다. 그는 이 계명을 통해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이를 "별세의 계명"이라 부른다.
이러한 신학적 시각은 독자로 하여금 십계명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단지 '해야 할 것'이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이 아닌,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 은혜 앞에 나 자신을 부정하며 하나님만을 주로 모시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이 책은 십계명을 문자적 규칙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넘어, 율법을 통한 죽음의 선언이 결국 은혜로 이끄는 통로임을 보여주는 신학적 성찰이다.
그리하여 『별세의 계명』은 십계명을 다시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닌, ‘죽어야 살 수 있는 계명’, 곧 별세의 계명으로 제시한다. 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적으로 붙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부르심이자 삶의 방식이다.
📖 2. 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이끄는 별세의 도구이다
『별세의 계명』에서 이중표 목사는 십계명을 단순한 도덕적 윤리나 종교적 규범으로 읽는 방식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십계명은 인간에게 의로움을 보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말씀 앞에서 자기 죄인 됨을 직면하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경로이다.” 이는 곧 율법의 목적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이며, 계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면적으로 전환시키는 선언이다.
성경은 말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 구절은 『별세의 계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로 기능한다. 저자는 이 말씀을 따라, 십계명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자각하게 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별세의 계명’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신자들이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해하지만, 이 책은 십계명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깊은 죄성을 경험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인간의 교만을 꺾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깨닫게 하며,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 꿇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은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는 그 죽음을 덮고 새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이중표 목사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돌판을 언약궤 안에 넣으신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율법을 직접 눈앞에 드러내고 그것으로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속죄의 피로 덮인 언약궤 속에 계명을 감춤으로써, 죄인이 계명 앞에서 죽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이자 구원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단죄의 언어지만, 그 단죄 속에 감춰진 구속의 뜻은 결국 사랑과 은혜로 이어진다. 언약궤 안에 계명판이 있다는 사실은 바로, 십자가가 율법을 완성하고도 남는 은혜의 성소임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인이 된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 헛되다는 절망이 아니라, 그 절망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심을 깨닫게 만드는 복음의 문장이다. 지킬 수 없음이 은혜로 가는 길이 되고, 불가능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든다. 이것이 ‘별세의 계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 계명은 인간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능성을 철저히 포기한 이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십자가의 통로이다.
이중표 목사는 또한 현대 교회의 두 부류의 신앙인을 대조한다. 하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 하고, 그 계명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율법적 교인’이다. 또 하나는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복음적 교인’이다. 전자는 계명을 통해 자기 의에 빠지며, 후자는 계명을 통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 이 구분은 단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영혼의 방향을 가르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이 책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계명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면 계명을 통해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가?”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넘어서는 것’으로, 법에서 복음으로, 행위에서 은혜로 나아가는 이 여정이 바로 별세의 길이다. 그리고 이 여정을 통해 율법은 죽음을 선고하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인 자는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별세의 계명』은 십계명을 다시 읽도록 요구한다. 더 깊이, 더 치열하게, 그러나 전적으로 은혜에 의지하여.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따르며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거울 삼아 날마다 자기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순례자의 길을 걷게 한다. 이 길은 험하고 불편하지만, 참된 자유와 평화로 인도하는 거룩한 죽음의 길이다。
📖 3. 계명은 하나님 백성에게 주신 삶의 방식이며, 성결과 자유의 길이다
『별세의 계명』은 십계명을 단지 ‘지켜야 할 법’으로 보지 않는다. 이중표 목사는 십계명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정체성의 선언이며, 자유인의 삶을 보장하는 해방의 언약으로 해석한다. 그는 “십계명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확히 천명한다. 즉, 십계명은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이 해방된 후,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한 은혜의 헌장이다.
출애굽기 20장 2절의 선언은 이 논리를 강력히 뒷받침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라.” 십계명은 이 전제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계명은 억압을 위한 족쇄가 아니라, 해방 이후에 주어지는 자유의 기준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에 묶이기 위함이 아니라,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별세의 계명』이 십계명을 ‘자유인의 약속’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 자유는 단순한 무질서의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질서 있게, 정결하게, 거룩하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들은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삶의 방식이며, 인간 안에 새겨질 새 언약의 토대이다. 율법은 외적 통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내면에 새겨지는 질서다. 이 책은 히브리서 10장 16절을 인용하며 말한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계명은 단지 돌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의 심령에 새겨져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따라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억지로 얽매이는 율법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질서이다. 십계명은 우리를 구속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법, 우리로 하여금 참 사람답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과 절제를 지키며, 생명을 존중하고 진실을 말하며 사는 삶은 결코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성결의 길이다.
이중표 목사는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을 강조한다. 그는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가면 그 길에는 보호와 생명이 있지만, 말씀이 없이 앞서가면 실패와 멸망이 기다릴 뿐이다. 법궤 앞에 제사장들이 섰을 때 요단강은 갈라졌고, 말씀이 광야를 인도했을 때 생수가 터졌으며, 법궤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었다. 반면, 말씀이 사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 이 모든 구약의 역사는 한 가지를 말해준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은 생명의 길이며,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준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별세의 계명』은 단호히 선언한다. “우리가 말씀을 잃으면 이미 죽은 자이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광야가 되고, 말씀이 없는 가정은 무너진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삶의 질서요, 영혼의 생명이며, 공동체의 희망이다. 그것은 율법이기 이전에 복음이다. 왜냐하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그 계명을 따라 사는 자는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고 자유함 속에서 기쁨으로 순종하기 때문이다。
계명은 또한 성결을 위한 도구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전, 백성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을 씻고 옷을 빨며 마음을 정결케 해야 했다。 『별세의 계명』은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며, 계명은 곧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정화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밝히며, 은혜를 사모하게 만든다. 율법은 스스로는 생명을 줄 수 없지만,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죽인 자에게는 성결의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렇기에 계명은 별세의 계명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세상의 질서를 거슬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을 닮아 살아가게 만드는 죽음의 길이자 생명의 길이다. 십계명은 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게 하는 은혜의 기틀이다. 계명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세상을 이기며, 이웃을 섬기고, 자신을 다스리는 복음의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 추천의 글 – 계명을 넘어 은혜로, 은혜 안에서 순종으로
『별세의 계명』은 십계명을 단지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윤리적 규범으로 읽지 않는다. 이 책은 계명의 문자 바깥에 있는 은혜의 빛을 추적하며,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죽게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복음의 여정을 펼쳐낸다. 십계명은 인간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거울이지만, 그 거울 앞에 서는 자는 단순히 정죄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넘어서 은혜로 나아가는 ‘별세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 그 앞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중표 목사는 이 책을 통해, 계명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율법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으로 초대하는 성결의 지도라고 강조한다. 계명은 자유를 잃게 만드는 굴레가 아니라,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이웃을 이웃으로 사랑하며, 생명을 생명답게 여기고, 진실을 진실로 말하며, 욕망을 절제하고, 관계를 지키는 삶. 이것이 바로 십계명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이며, 그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다.
십계명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 지키려 할수록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하게 만들고, 고백하는 자는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 율법을 붙드는 자는 끝내 자기를 높이지만, 율법 앞에서 무너지는 자는 오히려 은혜로 살게 된다. 이것이 『별세의 계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패러독스이며, 동시에 복음의 진실이다. 이 계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고,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 계명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죽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며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제자도의 물음이다. 이 질문 앞에 선 자는 결코 가볍게 대답할 수 없다. 계명을 지켜 자기를 세울 것인가, 계명 앞에서 자기를 죽이고 은혜를 붙들 것인가.
『별세의 계명』은 바로 그 둘 사이에서 우리를 “죽음을 선택하는 신앙”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질 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삶 속에서 다시 세워진다. 계명은 그렇게 우리를 허물고, 다시 세운다. 십계명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빚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도구다.
그래서 이 책은 말미에 이르러 더욱 분명하게 고백한다. “계명은 내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함 속에 내가 숨는 은혜의 피난처다.” 십계명은 나를 드러내는 법이 아니라, 나를 부서뜨리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렇게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제자, 곧 별세의 길을 걷는 자가 된다.
『별세의 계명』은 그 길 위에 선 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격려한다. 계명은 무겁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계명은 짐이 아니라 자유이며, 억압이 아니라 생명이다. 계명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계명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가장 온전하게 살게 하는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계명을 붙들라. 그리고 계명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길에 서라. 그 길에서 우리는 죽지만, 참으로 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