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의 인격개발
(사도행전 20:17~24)
이 중 표 목사
(한신교회)
서론
이번 세미나에서 다른 강사님들이 목회의 기능면을 주로 강의하셨는데 저는 목회자의 인격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령 목회에 있어 교육이나 설교나 선교 혹은 영성훈련 등이 목회의 기능적 측면에서 목회의 외부에 나타난 실적이나 형태 등에 주로 관심한 것이라면 저의 이 강의에서의 관심은 목회자가 최후에 설 자리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목회의 내면에 관한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본론
인격개발의 중요성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보면 목수인 아버지 밑에서 목수로서 기술을 배우면서 30년,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시느라 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속의 사업을 이루시기 위해 3일을 보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3일밖에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30년 세월을 보냈으며 또 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30년을 보내야 했고, 제자들의 인격을 개발시키기 위하여 3년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3년 세월 동안에 예수님이 하셨던 많은 일들 가령 병자들을 고쳤다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빵을 먹였다든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든지 하는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없었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인격이 성숙해지도록 끊임없이 개발시켰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는 어떤 의사보다도 위대한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직업을 의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가 말해 주듯이 농사에 관해서도 어느 누구보다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기잡는 기술에 있어서 베드로보다 앞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어부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유대인들이 랍비라고도 불렀지만 그의 직업은 선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직업은 철저하게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수직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목수의 기술을 배워서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목수였습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한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땅위에 친히 오셔서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년 동안 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기고 자로 재어 반듯하고 쓸모있는 재목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 모양의 사람들,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가꾸고 다듬어 교회의 기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그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에 따라 교회의 기둥으로 우리를 가꾸고 다듬어 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수직의 최대의 현장은 아마도 십자가상에서일 것입니다. 목수인 주님이 목수가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수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는 내가 간 것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목수로 가신다는 말입니다.
펄시 콜레목사님이 쓰신「내가 본 천국」에 의하면 천국은 옛날 만들어진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를 수호하던 천사마저도 오랫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다보니 천국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못 알아보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책에서 천국에서 가장 큰 맨션에 사는 사람이 누군가를 소개하는데 그것은 전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전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목수이신 주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친히 지으신 맨션이 예비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위대한 목수이십니다. 그는 하늘에서도 목수이시고 땅에서도 목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집만 짓는 목수가 아닙니다. 쓸로 없고 투박한 목재같은 인생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가꾸고 다듬어 하늘나라에 쓸모있는 일꾼을 만드시는 목수라는 말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인격입니다. 다른 사람의 교회는 부흥하는데 내 교회는 언제나 그 모양이냐 하면서 안타까워하며 고민하는 것보다 더 큰 과제는 자신의 인격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실적보다 내적인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인격 성숙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목회자의 인격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말씀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 목회자로서 자기 심정을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위해 50킬로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온 장로들에게 보여준 바울의 언행은 목회자로서의 위대한 인격을 말해 주는 귀한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장로님들과 목회자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다.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을 만나려고 그 먼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 왔습니다. 바울과 장로들은 서로 눈물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우리의 장로들과 눈물로 껴안고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목회이겠습니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또 장로 편에서도 목회자가 부르는 곳 어디나 달려와 목회자와 함께 모든 문제를 상의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훌륭한 장로가 되겠습니까? 멕가브란 박사가 그의 교회 성장학에서 말한 대로, 확실히 교회의 성장은 목사의 비젼만큼 성장하고 교인 수준은 장로의 수준만큼 형성된다는 말은 옳습니다. 장로의 수준을 교회가 넘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비젼과 설교의 능력과 성서적 교회성장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의 수준은 여전히 장로의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장로님이 열심히 기도하면 교인들도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장로님이 열심히 충성하면 교인들도 충성하게 됩니다.
첫째, 목회자는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변함없는 진실한 인격을 생각해 봅시다. 대개의 경우 목사들은 교인들 앞에서 유창하게 설교는 하지만, 자신의 인격에 과한 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왜냐하면 몇몇 교인들이나 장로들은 목사 가까이에서 목사의 인품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있게 얘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장로들 앞에서 자기의 삶과 인격을 자신있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일관되게 행했던 그의 목회와 인격의 발자취를 자신있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의 인격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시종여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 교회에서 3년 목회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30년 목회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목회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에서 목회하는 경우를 보면 1년에 22%의 인구가 아파트마다 이동합니다. 그러니까 3~4년되면 얼굴이 바뀌게 됩니다. 계속 나가고 또 새로 들어오니 언제나 얼굴이 새롭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그의 인격을 전면에 공개하지 않더라도 목회가 가능합니다. 얼굴만 잘 생기고 호감살만한 매너로 대인관계만 원만히 잘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목사의 사생활을 알려고도 않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목회의 한 생을 끝내려고 하거나 그의 인격이 분명하게 노출되는 시골 목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기목회를 하려면 목사는 그 인격이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메시지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처음에는 사명을 가지고 시작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사명이 식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후배는 저더러 목사님은 나이가 50이신데 사명이 식지않고, 옛날의 그 열정으로 일하시니 그 비밀을 알 수 없노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열심이 옛날에 비해 많이 퇴색하고 늙은 것을 압니다. 그 눈물, 그 감격, 그 정열이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때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교회를 훌륭하게 섬기고 있었는데, 교회가 문제가 생기다 보니 그것 때문에 사모님이 쇼크를 받아 중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4~5년 동안 꼼짝을 못하고 병석에 누어있게 되었고 목사님은 심방갔다 오시면 약을 다려다 사모님을 간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니까 목사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이제 그만 죽지 너무 오래 산다” 그런 생각으로 약단지를 가지고 방문을 여는데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약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라 죽이는 사약이다.” 그런데 사모님은 그런 약을 며칠 더 드신 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내가 어떻게 강단에 설 수 있겠는가? 병으로 고생하며 죽어가는 아내에게 사약을 먹였으니 나도 목사인가? 그렇게 생각한 목사님은 40일 금식에 들어갔고 진실로 회개한 다음 강단에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모님들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목회를 못하고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병든 사모님이 죽고 새 사모님이 들어오면 좋은 것 같아도 교인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은 사모님들 오래 사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은 제가 과천에 갔다 오는데 운전을 하던 집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시고 주무시든지 명상을 하시든지 하세요.” 그 말을 들으니 집사람이 나와 함께 고생한 일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집사람은 그런 내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우세요?” “당신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뭐가 미안해요?” “나와 함께 살아 준 일이 고맙고 미안해” 그래서 우리는 함께 울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와 함께 사는 집사람이 참으로 고맙고, 또 한편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 때 집사람을 깨울 수 없습니다. 하루종일 나 때문에 고생하고 몸이 약해 피곤해서 잠을 자는데 어떻게 깨울 수 있겠습니까? 이 종이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이 많은 권사님이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사모님은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잔다”고 말하면서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그 권사님을 불렀습니다. “권사님, 이 교회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목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사모에게 월급 주었습니까? 목회는 이 종이 할 것이요, 교회 일은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사모에게 충격을 주지 마십시오. 만약에 연약한 사모가 괴로움에 쓰러지면 권사님이 살아 줄 것이오?” 이때 권사님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사실 사모가 약해지거나 병 들거나 집을 나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목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사모가 살아 준 것만으로도 목회의 50%는 달성된 것입니다. 사모가 무슨 은사나 능력을 나타내고 기도와 심방으로 목회를 도와주는 것보다 조용히 있어주는 것으로도 최대의 협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모를 시집살이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사모를 평론하거나 시비하면 목사는 사모를 아껴주고 교인들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 앞에서는 천사가 되고 유창한 설교자가 될 수 있어도 사모에게는 진실한 인격과 사랑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모가 자기 남편을 진실한 인격자로 신뢰하고 존경한다면, 교회가 작거나 크거나 그 목사는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진실은 목사의 생명입니다.
예수를 닮는 인격
우리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보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는 일입니다. 누가 축복 받은 종입니까?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이루었기 때문에 축복받은 종입니까?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의 그 인격을 닮아 그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종이 가장 축복받은 종입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 축복받은 종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으려고 애쓰는 종이 축복받은 종입니다.
제가 한신 대학에 다닐 때 신연식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는데 강의 시간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한 백 번은 하시는 분입니다. 그에게 기독교 교육의 중심은 사랑이요, 내용도 사랑이요, 그 방법도 사랑이었습니다. 한 번은 시험을 보는데 얼마만큼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성령님이 이 종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종아 너 무슨 시험을 치고 있니?” “예, 기독교 교육이옵니다.” 이때 성령님이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쳐라” 그때 제가 시험지를 덮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묻습니다. “이군, 다 썼나?” “예 다 썼습니다.” “벌써?” 교수님은 이 종의 실력을 아시니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시험지를 덮고 저는 기도실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시험을 치러 하나님의 점수를 따기 원합니다.” 이때 성령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글로 써서 표현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점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점수는 그 사랑을 나타내고 그 사랑의 종이 되고 그의 어린양을 사랑하므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오매, 종으로 하여금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저는 지금까지 목회해 오면서 이런 정신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종이 이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저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하나님에게 받은 시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로부터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어느날 시골교회의 정원에 앉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 종을 사로 잡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또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종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저 바람소리를 들어보라.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있다. 그 들에 피는 한송이 꽃을 보아라.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미소가 있다.” 저는 그 사랑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피는 꽃,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성호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감격하여 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감격하여 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주님의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만 생각해도 가슴이 뜨거워졌었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예수님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일생을 회고해 볼때,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모두 우리의 심령을 뒤흔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감동적인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야말로 무한히 깊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웃을 만한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시고, 깊은 우정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친히 담당하시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은 전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부드럽게, 아니 간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구원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시어 권고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멸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조국의 멸망을 안타까이 보시며, 애국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마음에는 각 사람을 향한 인정과 애정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는데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하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 깊도록 홀로 눈물 흘리시며,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제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눈물로 기도를 드리셨으며, 또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이 눈물은 종교적인 눈물이며 인간구원을 향한 눈물입니다. 생각하여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인류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심장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하여 쏟으신 그리스도의 피맺힌 눈물의 흔적을 발견하기까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버림받는 그 아픔의 눈물이 내 심장에 적시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통곡 속에서 저 지옥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하며, 그 눈물에서 무한히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찾아야 합니다.
제가 고부교회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어느날, 저는 고난주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하루 종일 금식하고, 조용히 머리숙여 기도하다가 제단 가운데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이런 음성이 내 심장을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몸 버려 피흘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버리고 있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때,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케 하시는···”(롬 8:26) 그리스도의 영이 이 종의 심령 속에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제단을 적시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내렸습니다. 너무도 많은 눈물이 매일같이 흘렀습니다. 이 패역한 도성을 부둥켜 안고, 밤이면 산에 올라가 온 몸이 이슬에 젖도록 울었고, 낮이면 하나님을 모르는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눈에서는 눈물이 시내처럼 흘렀습니다.
어느날 새벽 4시에 새벽종을 치기 위하여 종 줄을 잡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 고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어두움에 잠든 이 백성들에게 잠을 깨우시고, 새벽을 알려주소서’하는 순간 눈물이 가슴 속 깊이에서 흘러내리면서, 나의 앞에 나타난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종 줄을 놓고 땅에 엎드려, ‘주님 왜 우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내 종아, 지금까지 너의 그토록 많은 눈물은 너의 눈물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서 흘린 눈물이었다’는 응답이었습니다. 이 비천한 종에게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을 알았고, 그 눈물이 헛되지 않아 많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부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나를 아는 할머니(후에 송옥순 집사가 되었음)는 왜 우느냐고 묻기에 이 고을사람이 죽었기에 슬퍼서 우노라고 하였더니, 이 고을 누가 죽었느냐기에 할머니 손목을 잡고 바로 할머니 영혼이 죽었기에 슬피우노라고 전도하여 구원받게 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물이 우리의 심장에서 흘러야겠습니다. 오늘 눈물이 말라버린 제단과 성도의 심령을 보시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눈물을 주소서. 그리고 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에 눈물 없이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지난 날 불충한 과거를 통회하는 베드로의 눈물이(막 14:72) 있어야 진정한 제자의 길이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고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는 헌신의 눈물이 있어야 제단에 향유 냄새가 날 것입니다(눅 7:37).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형제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바울의 눈물(빌 3:18)이 있어야 전도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양들의 목을 껴안고 우는 목자의 눈물이 있어야 교회는 은혜롭고 아름다운 양들이(행 20:37) 될 것입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 흘리는 사랑의 눈물(행 20:19)이 있을 때, 자랑스런 목회자가 되어질 것입니다. 다같이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찬송을 부릅시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에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우리에게 눈물이 있어야겠습니다. 목자로 부름받은 우리가 심장에 주님의 그 눈물이 있는가 반성해 봅시다.
목회자는 물질에 깨끗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로부터 자유를 누리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남에게서 빌린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죽을 때는 옷까지 벗겨주고 아리마데의 무덤을 빌려 사흘 밤을 쉬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물질로부터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것이니라.”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큰 유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금이나 은이나 탐하지 아니하고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라”라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과 눈물은 바로 주님께서 가지신 고귀한 인격의 모습입니다. 또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했습니다. 이 끝까지 참는 것 이것도 사도 바울의 덕성이었습니다. 주의 종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는 온유한 성품을 길러야합니다.
한국교회에서 크게 목회하시는 분들은 대개 온유한 목사님들입니다. 비판적이고 정죄하는 목사가 목회에 성공한 예는 없었습니다. 몇 일전에 어떤 담임목사 취임식에 갔더니 한 목사님이 강단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저런 신자들을 위해서 목회하는 것을 생각할수록 비위가 상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좀 더 온유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그 온유함이 세상에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광야 40년간의 연단의 결과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침없이 전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인격은 공과 사가 일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어디에서나 그의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교회에서만 목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목사이며 불신사회에서도 목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끝없는 목민의 목회입니다. 자기 백성인 유대인은 물론 멀리 헬라인까지 그의 목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회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이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에 50명의 교인이 나온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교회가 속한 도시의 주민이 3만 명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목사가 해야 할 목회의 한계는 3만 명입니다. 우리는 50명이 모이는 교회의 영혼들만을 위해 파송되지 않았습니다. 3만명 모든 백성들의 영혼들을 위해 파송받은 것입니다.
이번 세미나가 끝나 교회로 돌아가시면 그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 가십시요. 올라가서 가슴에 손은 얹고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오 주여 감사합니다. 이 모두를 나의 양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어떤 지역에 목회하러 들어가면 그 지역의 가로수까지도 내 책임으로 압니다. 길거리 돌맹이 하나 잘못 놓인 것도 내 책임라고 생각합니다. 길거리에 있는 소똥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밭에다 거름을 놓고 지나갑니다. 유리조각 하나라도 아이들이 밟으면 다칠까봐 치워놓고 갑니다. 집집마다 문풍지가 떨어졌나 안 떨어졌나를 보면서 떨어졌으면 추울 것 같아 종이를 갖다 주어야만 합니다. 가난에 굶주린 형제를 보고도 태연하게 자기 집으로 가 발 뻗고 잠을 자는 목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집이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목회자의 사랑의 인격입니다.
이 종이 시골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성탄준비를 위해 기도하는데 성령님이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너희는 매년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며 새벽송을 부르는데, 네가 누굴 위해 이 세상에 왔지?” “만백성이 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상의하여 온 가정을 다 다니면서 타올 한 장씩 돌리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는 그 교회가 서 있는 지역전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오고 난 후에는 한국전체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앞으로 통일을 위해 그리고 통일이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를 고민하며 살아갑니가. 우리의 목회는 그러므로 목민의 목회, 민중의 목회입니다.
다음으로 목회자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소명적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면 삶을 새롭게 출발하고, 시작부터 분명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먹고 배부름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우가 좋다고 자랑을 삼으려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섬기는 자의 생활을 보람으로 삼고, 마지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기까지는 이 길은 위선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최대의 영광의 길은 양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삼아야 선한 목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지 못하고 양들이 주는 고급 음식에 만족하며, 주의 사자를 대접한 사람에게 하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천사의 방언을 하고 있다면, 에스겔이 이스라엘 목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 하는도다.”(겔 34:2~3) 우리는 어린 양들에게 젖을 내라 말하기 전에 양들을 먹이지 못하는 목자인 것을 우리는 다같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목회자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물질적 부요를 자랑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위선입니까?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고후 8:9). 물질적 축복을 받았으나 가난한 형제들에게 먹였기에 더욱 자신이 가난하여졌을 때에 축복받은 목자가 될 것입니다. 저의 무디어진 가슴을 깨뜨려 생수처럼 눈물을 솟아오르게 했던 성자, 김홍섭 판사가 있습니다. 그는 인류양심의 사도 법관, 정의로 살았던 애국자, 어린 양을(가난하고 불쌍한 피고자) 먹이기 위해 자신의 박봉을 털어준 사랑의 성자였습니다. 김 판사는 법정에서 피고인들에게 형을 선언한 후에는 조용히 감방을 면회하고 사랑의 믿음을 나눈 사랑의 사도요, 양심의 법관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애를 담은 재판에 감동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까지도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저녁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낮에 법정에 나와 앉아 있던 가난한 피고인들의 가족들이 지금쯤 추운 방에서 떨고 있을 생각을 하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51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병명은 간경화였으니 영양실조로 온 병이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숭고한 길입니다. 나는 먹었으나 굶주린 사람이 생각나서 배부름이 없고 식탁에 앉아 가난하여 배고파 고생하는 형제들을 생각하여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는 조그만한 양심의 스릴이라도 느끼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자들처럼 비판하고 현실 교회를 정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한 입으로 바르게 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목회자 한 분이 있습니다. 그가 한신 대학을 졸업하고 가난한 시골 교회에 갔을 때는 실오라기 같은 목회자의 양심 때문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아, 밤이면 조용한 시간에 저들 집에 찾아갔고 자기 아내는 가난에 견디다 못해 몇 번이고 영양실조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얻은 병 때문에 지금까지 허약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막 결혼하여 신혼 생활에 덮었던 이부자리가 몸에 닿았을 때 가난한 내 형제의 추위에 떠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다음 날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가난한 형제들과 삶을 나누며 평생을 함께 살지 못하고, 몇 년 후 또 다른 교회를 향하여 떠나게 될 때 배신자, 위선자 하면서 혼자 몇 번이고 울부짖으면서 그 땅을 떠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의 강단에서는 양들을 사랑하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날 우리 선배들이 양심으로 걸어간 순교자의 생활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난을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간 종들을 생각하면 이 사치스런 현실을 문명의 혜택으로만 자위할 것입니까? 나는 선한 목자는커녕 삯군 목자라도 바르게 되어 보려고 20여년 뛰고 달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방목회(死房牧會)의 길로
저는 마지막으로 사방목회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성공적인 목회는 삼방 목회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의 골방, 둘째는 연구하는 책방, 셋째는 전도하는 심방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는 사방 목회입니다. 사방(死房) 목회는 죽음의 길로 가는 목회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목회자들은 그의 목회를 감방에서 마쳤습니다. 우리가 흔히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십자가에 죽었던 스승 예수로부터 나왔고, 그들 또한 그들의 스승처럼 감옥에 가서 죽는 것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3년동안 제자훈련해서 된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제자의 도를 깨닫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교회사의 위대한 목회자가 누구입니까? 큰 교회를 담임한 목사입니까? 설교를 잘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감옥에서 죽음으로 목회자의 최후를 마친 주기철, 손양원 등 순교 목회자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었으면 먹는 양식이 달라야 하고, 보는 세계가 달라야 하고 최후에 서야 할 영광의 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의 순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매일 순교가 있고 일시적인 순교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순교보다 매일 순교는 더 어렵습니다. 날마다 순교한 목자는 가는 곳마다 평화가 있고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에게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시끄러운 것은 죽지 못한 목자들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싸우지 않습니다. 진리와 전통 보수를 위해 교회에서 싸운다 말하지만, 예수는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악법인 로마법에 처형을 달게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리로 영원한 승리를 거둡니다. 사소한 이권이나 명예나 자존심으로 싸우지 말고 날마다 죽는 순교자의 삶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광을 바로 알기까지는 참 목회자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자기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만약에 현세의 부귀와 안일한 생활을 원한다면 목회자 생활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권의 명예나 정치적 욕망이 있다면 치사스런 교권에 연연하지 말고 넓은 세속의 정치무대로 삶의 판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세속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제물로 죽을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감옥으로 가면서 위대한 목회가 이루어지고 진리의 파수꾼, 사랑의 성자가 되어 갔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감옥에서 이루어진 옥중 목회입니다. 그가 남긴 모든 서신이 평안한 별장 침대에서 된 것이 아니고 눈물과 피로 얼룩진 춥고 배고프고 어두운 감방속에서 창작되어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감옥에서 또 가이샤라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그도 베드로처럼 원지 않는 곳으로 끌려 다녔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일생이 감옥을 자기 호텔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설교가는 바울은 새로운 도시를 찾아 갈 때마다 여기 호텔이 어디있오?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감옥이 어디있오?라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2~13) 내가 로마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고 양들을 참된 양식으로 먹이다가 들어가는 감옥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될 줄을 너희가 알기 원하노라.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로마의 복음화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복음화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뿌린 순교의 피로 맺은 결실이요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눈물과 피로 쓴 복음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결론
목회자의 길은 내가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이끌어 주셔야 갈 수 있는 길 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에 매임을 받은 자는 이 길이 쉬운 길이요, 즐거운 길이요, 영광스러운 길이기에 뛰고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살 길은 하나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제쳐놓은 연고로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은 있으나 살아있는 말씀은 없고, 말씀의 모양은 있으나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 역사의 불의와 악이 한 치도 후퇴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오, 주님이시여. 말씀을 제쳐놓은 한국강단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거룩한 종들이 이 성산에 와서 강단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부르짖사오니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 스데반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 바울에게 주신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 한국 교회의 새로운 불씨가 되어 새 역사의 강단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니이다. 아멘”